1883년 일본제1은행 부산지점의 인천출장소로 개설되어 1899년 신축된 좌우대칭의 절충주의 양식의 건축물이다. 1888년 인천지점으로 승격되어 해관세, 한국산 금괴 및 사금의 매입업무를 대행, 점차 은행 고유업무를 담당하거나 이후 한국은행 및 조선은행 인천지점으로 변경되었다.
1890년 9월 영국 해군 종군신부 코프주교(Charles John corfe)와 내과 의사 랜디스(Elibarr Landis)가 인천에 도착하면서 포교가 시작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원래 성 누가병원이 있던 곳에 세운 것으로 1956년 6월에 완공됐다. 건물은 지붕의 목조 트러스를 제외하고 외벽 등을 화강암으로 쌓은 중세풍의 석조물이다.
1883년 설정된 일본조계와 1884년 마련된 청국조계와의 경계로 중앙에 돌계단, 양쪽에 조경 공간을 두었으며 계단 위쪽에는 중국 청도에서 기증한 공자상이 세워져있다. 13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계단을 중심으로 확연하게 다른 청국과 일본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청나라시대 중·후반기 소주지역 문인들의 정원양식을 활용해 조성한 야외문화공간으로 중국 전통정원에 사용되는 영벽(影壁), 조벽(照壁), 정자, 목교와 연못, 대나무 및 용기와를 얹은 담장으로 중국적인 분위기를 조성해 관광객들에게 볼거리와 휴식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1883년 일본조계지 내 거류민 보호 목적으로 일본영사관 이사청, 인천부청사로 사용되다 1933년 지상 2층으로 신축, 1964년 3층으로 증축되었다. 광복 후 인천시청으로 활용하였고, 1985년부터 중구청으로 사용되고 있다. 모더니즘 양식의 수평의 긴 띠창이 특징이다.
1891년 인천에 거주하던 외국인들의 사교클럽으로 조직되었다. 처음에는 중구 관동 1가의 목조단층 건물에서 출발, 1901년 지금의 자유공원 기슭에 러시아인 사바찐의 설계로 지상 2층의 벽돌조 건물을 지어 옮겨왔다. 1914년 이후 일본재향군인회가 사용하면서 정방각(精芳閣)으로 불렀으며, 광복 후 미군의 장교클럽, 시립박물관, 문화원 등 여러 용도로 사용되다가 현재 제물포구락부의 옛 모습을 재현한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인천지역에 설립된 최초 개신교회. 1885년 7월29일 교회 설립. 아펜젤라 선교사에 의해 내리교회 시작. 내리(內里) 교회는 한국 최초의 감리교 내한 주재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1858∼1902) 부부가 1885년 4월 5일 오후 3시, 제물포 항에 내림으로써 시작된 한국 개신교회의 유서 깊은 교회인 만큼 숱한 역사적 흔적들이 고스란히 간직된 곳이다. 1888년 한국에 들어와 인천에 11년간 체류한 조지 존스(1867∼1919) 선교사의 서해권(西海圈)선교(인천, 강화, 해주 등)의 전진기지로서의 얼이 서려 있고, 역사적 발자취가 오롯이 남아 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한생활사 전시관에서는 1960~1970년대 인천중구의 생활사를 볼 수 있다. 인천 중구가 출범한 1968년을 기준으로 1960~70년대 인천 중구와 관련된 생활사를 볼 수 있는 전시관이며 인천항이 자리한 인천광역시 중구는 ‘제물포’가 위치한 곳이라는 점에서 또다른 의미가 있다.
1884년 4월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체결된 인천구화상지계장정(仁川口华商地界章程)에 따라 인천에 청국전관조계(清国专管租界)가 설치되고 이듬해인 1895년 1월 청국영사관이 건립되었다. 당시 청국영사관은 본청(本厅) 외에도 순포청( 巡捕厅 )과 전보국( 电报局 )이 함께 있었다.
송학동 옛 시장관사는 1901년 개인 사유지의 별장으로 지어졌으며, 해방 이후 서구식 레스토랑과
사교클럽으로 쓰이고 1965년 인천시가 현재의 건물을 신축하여 1966년 김해두 인천시장부터 민선 초대
최기선 시장까지 인천시장 17명이 관사로 쓰여진 장소이다.
2021년 시민이 직접 선정한 이름 ‘인천시민愛집’으로 바뀌면서 개항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공간의
역사성, 장소성을 고려해 전시, 휴게공간, 음악회장 등 복합역사문화 공간으로 운영된다.
자유공원 플라타너스는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플라타너스로, 1883년 제물포 개항 이후
현 중구 자유공원 일대에 미국, 러시아, 프랑스, 영국 등 서양 국가들이 조계를 형성하고,
우리나라 최최의 서구식 공원인 만국공원(자유공원)을 조성하면서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
플라타너스는 수령이 130년 이상으로 높이 30.5m 둘레 4.7m에 달하는 한국 근현대사의 산증인이자
자연유산으로 가치가 크다.
1888년에 조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근대공원으로, 1897년 설립한 서울의 탑골공원보다 9년이나 앞선다. 공원의 설계는 러시아 토목기사인 사바찐이 담당했으며, 각국 공동조계 내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각국공원이라 불렀다. 일제강점기에는 서공원, 광복 후에는 만국공원으로 불리다가 1957년 맥아더 장군 동상 건립 이후 자유공원으로 개칭되었다.
개항 후 인천항의 물류운송 업무가 증가하자 갯벌을 매립하여 이를 보관할 수 있는 창고 건물들을 세웠다. 특히, 인천아트플랫폼이 위치한 해안동 일대는 1899년 매립된 지역으로 현재 이러한 산업문화유산을 활용하여 예술활동을 하는 작가들이 입주하는 시설과 시민들이 다양한 문화행사를 체험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조성하였다.
인천에 세워진 마찌야(町家)형 주택은 일본의 전통 도시주택과 같은 유형의 2층 목조건물이다. 나가야 (長屋)형 주택은 1층 목조건물이다. 개항 초기 인천에 세워진 일식주택들은 대부분 목조이며 점포가 달린 주택들로 마찌야 형식과 나가야 형식이 대부분이었고 주거기능만을 갖는 주택은 일제강점기에 관리나 사업가 등 비교적 상류층 사람들을 중심으로 건축되었다. 1930년대 이후에는 인천에도 일본의 문화주택이 세워져 지금도 관동과 신흥동 일대에 여러 채가 남아있다.
미래세대를 위한 열린 실험실
이음 1977은 인천도시공사가 「개항장 지역문화재생시범사업」으로 만들어가는 실험적 문화거점 공간입니다. 개항장의 소중한 건축자산을 보존하고 활용하여 사람, 시간, 공간, 지역을 이어주고, 미래세대를 위한 지속가능한 지역문화생태계를 만들어 가는 열린 문화거점 공간으로 변모합니다. 인천의 건축자산
이음 1977은 1977년에 완공된 단독주택으로 역사적‧지리적‧건축적으로 보존가치가 큰 인천의 소중한 건축자산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인 자유공원과 인천 개항기 외국인 사교장으로 활용 되었던 제물포 구락부, (구)인천시장관사와 인접하고 있습니다.
삼국지 소설 속의 유비, 관우, 장비, 제갈공명 등의 무용과 지모를 소개 하는 150m 길이의 대형벽화이다. 후한(後漢) 말의 역사적 사실을 고사성어와 그림으로 보면서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즐길 수 있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 중국 원나라의 작가 나관중이 지은 장편역사 소설로 유비, 관우, 장비가 도원결의 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오나라의 손호가 항복하여 천하가 통일될 때까지의 사적을 소설체로 풀어 서술한 중국 사대기서(四大奇書)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인천역에서 패루를 지나 언덕을 오르면 차이나타운의 중심 거리를 만날 수있다. 중국 전통 의상인 치파오를 입은 화교 상인들과 최근 복원된 중국식 근대건축물과 중국을 상징하는 붉은 색의 간판, 홍등을 볼 수 있고 차이나타운의 대표 음식인 짜장면과 공갈빵, 월병, 중국차도 맛볼 수 있다.